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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평화 글쓴이 : 윤희문 2017.11.23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평화

 

간혹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말을 합니다.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것은 바른 결정을 내렸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느낌으로는 하나님의 평화인지를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평화는 비밀입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평강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평화를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세상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평강의 선물을 주십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내 마음이 아무리 평안하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일의 불확실함 속에서 영혼의 불만과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죄수로 호송되는 바울 일행이 로마를 향해서 가는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풍랑 속에서 선장도 떨고, 선주도 떨고, 바울을 호송하던 로마 장교 백부장도 떨었습니다. 과거의 경험도, 재물도, 칼과 권력도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배의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생의 풍랑 속에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풍랑보다 내가 더 크다는 것을 믿느냐?” 우리가 , 믿습니다!” 라고 말씀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의 선물을 주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33)

 

 


친구여,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글쓴이 : 윤희문 2017.11.16

친구여,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아름다운 가을 하늘과 단풍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스며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받은, ‘어여쁜 그대여라고 불러주시는 우리들이 함께 있어도 가을만큼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함께 올라간 산에서 텐트를 치고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친구들, 새벽에 붕어가 잘 잡힌다고 낚싯대를 던져놓고, 긴 밤을 곁에 앉아 말없이도 함께 있음에 부족함이 없었던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그 때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있는지 알 수 없어도, 주님 안에서 만난 형제 자매들이 그들을 대신해 줄 수 있어야할텐데 우리는 그렇게 바라던 우정을 얻지 못하고, 큰 기대를 갖고 시작한 우정이 오래가지 못하여 실망하고 맙니다. 오랜만에 “Water Is Wide” 란 노래를 들어보았습니다. 바다가 넓어 날아서 건너갈 날개는 없어도, 우리 함께 저어갈 배를 달라는 노래입니다. 바다가 아무리 깊어도 우리 사랑이 더 깊어서, 나의 사랑, 그대와 함께라면 이 깊고 넓은 바다를 노저어 건너갈 수 있다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는 열두명 밖에 안되는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시기하고 자리 다툼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섬기시며 불쌍하게 여기시며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던 주님을 닮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서 새벽에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을 위해 밥을 지어놓고 자녀들을 기다리던 어머니처럼, 고기와 떡을 구워놓고 기다려주셨습니다.

 

갈릴리 호수, 새벽에 제자들을 만나주신 부활의 예수님이 그리워집니다. 나는 너의 친구라고 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과 맛있게 구워진 생선을 나누어 먹으며 세상도 잊고 나도 잊을 수 있는 그 우정과 사랑이 그리워집니다. 그 때 그들은 누가 주님 곁에 앉을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은 하나님과 우리를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어서 환상이나 노래가 아닌 현실인 것을 깨닫게해 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요한일서 3:1)


천국엔 쓰레기통이 없다 글쓴이 : 윤희문 2017.11.08

천국엔  쓰레기통이 없다

 

회개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눈물과 아픔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한 세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눈물과 아픔의 회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기도한 세리가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세리가 마냥 슬퍼하면서 집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물이 기쁨으로 변하여 찬양하고 돌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회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았을 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혹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열매이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받은 기쁨이 삭개오로 하여금 그런 결단을 하게 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참회개와 진정한 용서가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천국입니다.

 

복음의 기쁨 속에서 많은 것들이 회복됩니다. 회복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으로 이제 나는 더 좋은 나가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더 좋은 자녀됨과 부모됨을 향한 갈망이 회복됩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이 회복될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을 보는 시각도 회복됩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은 기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내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와 관계없는 막연한 장소나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 속에서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천국은 낯선 곳이 아니라 회복의 장소이고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회복의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았을 때도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매고목자는 돌아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작은 아들이 돌아오자 그의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에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은 관계의 회복 속에서 되찾은 자의 기쁨은 더해지고, 회복된 대상의 기쁨도 더욱 넘치게 됩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요, 그래서 천국엔 쓰레기통이 필요없습니다.


우리 글쓴이 : 윤희문 2017.11.01

우리

 

성경에는 우리라는 낱말이 창세기 1장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실 때 처음으로 우리란 낱말을 쓰시면서 하나님도 우리란 공동체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1:26) 특별히 사람을 만드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로 우리의 형상,” 그리고 우리의 모양대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치실 때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내가 아닌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나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 ‘우리란 낱말을 사용하시며 신앙 생활의 공동체적인 의미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쓰는 고유한 말의 표현 가운데도 우리가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 집,’ ‘우리 교회심지어 자기 아내를 우리 집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에게제한되는 것 까지도 우리란 일인칭 복수로 확대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끈끈한 정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깊이 들어가보면 우리들이 우리란 말을 쓰는 경우, ‘우리라는 말이 갖는 공동체적 뜻보다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라는 의미에 더 큰 중점을 두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거나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매우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동아리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우리가운데 끼어있지 않은 사람들을 배척하고 왕따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신 것은 내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64:8) 선지자 이사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색갈이나 계층으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포함한 열리고 넓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고 기도하기를 또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이방인이라도, 주님의 크신 이름을 듣고, 먼 곳에서 이리로 오면간구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셔서…”(왕상 8:41,43) 그러면서 이제까지는 원수들이요 죽일 대상이였던 이방인에게도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인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 한 교회 안에도 닫혀진 우리가 많아지고 있다면 과연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리고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하나님의 교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할 것입니다.

 

절망하고 있습니까? 글쓴이 : 윤희문 2017.10.26

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바닥이 없을 것같은 깊고 어두운 구멍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절망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마음의 욕심을 채워보려고 몸부림치는 인생들은 절망을 다룰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은 어쩌면 욕구아니면 욕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까요.


절망은 욕심에서 오고 그 절망을 피하기 위해 욕심은 더욱 커지고 그럴수록 절망도 더욱 깊어만 갑니다. 이 절망을 그대로 놓아두면 영혼의 상처가 깊어지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절망을 잊기 위해 욕심만 따라 살다보면 숨겨져있던 절망이 순식간에 쓰나미처럼 내 인생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찾아가서 털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았다는 느낌만 남을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위로보다는 조롱과 비웃음이 메아리처럼 되돌아 오기도 합니다. 아직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만큼 진실하지도 못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린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부분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전부를 아는 것처럼 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절망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욕심덩어린 나도,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이웃도 오히려 더욱 목마름만 더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듯 내가 나 자신을 안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나도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세워놓은 울타리를 거둘 때 오직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십니다. 그럴 때 나를 미워하고 힘들게 하느 사람까지도 안아주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나의 모습을 보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기대하는 방식이나, 내 욕구와 바램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채우고 나의 가장 큰 바램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다른 것을 다 빼앗기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만은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나의 영혼을 치유해 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우리의 고민과 슬픔 글쓴이 : 윤희문 2017.10.19

우리의 고민과 슬픔

 

고민과 걱정은 10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도 죽인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마음의 염려는 이렇게 뼈를 상하게 합니다. 과거에 저지른 죄와 허물을 생각하며 갖는 고민, 어려운 현실 문제를 놓고 연약한 자신을 보면서 갖는 고민, 그리고 막연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고민이런 것들은 우리를 낙심시키고 좌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여기에다 유언비어(蜚語)까지 퍼져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혼돈하게 하고 관계를 어지럽혀서 사는 일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흐를 유에 말씀언, 바퀴벌레 비에 말씀 언. 유언비어는 떠돌아 다니는 말은 해충같이 해롭다는 뜻으로 여기저기에서 떠도는 근거없는 소문을 말합니다. 요즈음은 social media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올려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데,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까지 그 대표적인 예로 백성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주로 Panera Bread에 가서 가까운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 장소가 가까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어권의 교우들은 Panera Bread가 아니라 ‘Rumor Bread’라고 부릅니다. 모여서 교제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서부터 유언비어와 남을 비방하거나 과장되어 부풀어진 말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 자녀들이 본 어른들의 모습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와 누가복음에 보면, 예루살렘을 보며 한탄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한 고민과 마음의 아픔 때문에 한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물론 끝없는 인생의 고통과 고민의 늪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할 근심이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고통과 혼돈과 불신과 허탈감 가운데 사는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비판의 소리, 심판의 소리, 자학과 욕지거리는 많지만 진실로 미국과 우리의 조국과 교회와 세상을 위해 눈 밑을 적시며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책임질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와 민족과 세상의 어두움이 물러가도록 주님 앞에서 무릎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은혜와 결혼하였습니다 글쓴이 : 윤희문 2017.10.12

은혜와 결혼하였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었을 때 은혜를 버리고 율법과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율법과 혼인한 상태로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율법과의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내가하는 모든 일을 계속해서 비판합니다. 또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에 대해 지적합니다. 율법은 항상 명령하기 때문에 그와 한참을 살다 보면 더 이상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어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8 3절에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죽음 이전까지 율법과의 혼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결국 아담 안에서 율법과 결혼한 옛사람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동참하고 부활과 연합하여 새롭게 태어났고, 창조된 새사람이 되어 예수님과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은혜와의 결혼은 율법과의 결혼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릅니다. 은혜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며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할 때도 은혜는 신실하게 함께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리를 모른다면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 7:14)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7:6)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결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이나 규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늘 채워주시는 은혜로 율법은 완성됩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8:4) 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글쓴이 : 윤희문 2017.10.06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 2장에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께 데려간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그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다. 이를 본 당시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예수니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도운 네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더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매우 가치있고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한 치유와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믿음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믿음도 중요하게 보십니다. 바디매오의 믿음, 로마 백부장의 믿음처럼 개인의 믿음이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듯이, 중풍병자와 함께 했던 그들의 믿음도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올림픽 경기 때 개인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도 무척 기쁜 일이지만, 선수들이 한 팀이 되어 금메달을 따게 되면 느끼는 기쁨이 사뭇 다릅니다. 빙상 종목에서 계주로 금메달을 딸 때는 무언가 더 뿌듯한 기쁨이 밀려옵니다. 우리가 함께 했다는 긍지와 기쁨입니다. 올림픽 이야기를 하자니, 도마뱀 생각이 납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산문집에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일본 도오쿄 올림픽 스타디움 확장 공사를 하기위해 인부들이 지붕을 벗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벽에 지난 3년간 꼬리쪽에 못이 박힌채 죽지 않고 살아있는 도마뱀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공사를 중단하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빈 자리가 많은데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시며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 4명이 한 명을 섬기고 인도하여 주님께로 나오면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한 영혼을 귀중히 글쓴이 : 윤희문 2017.09.28

한 영혼을 귀중히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주님의 마음은 한 영혼을 귀중히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병을 고치실 때 집단으로 고치신 적이 없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요즘 치유 집회가 있어서 병고치는 은사를 가지신 강사는 한꺼번에 그 집회에 온 사람들의 병을 고칩니다. 한 무리가 동시에 뒤로 자빠지기도 합니다. 누군지 몰라도 예언도 하고, 손만 얹으면 병이 낫고, 방언도 하는 등 하나님의 치유와 기적의 역사가 강사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적은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집단으로 해결해 주신 것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여 보시고, 눈을 바라보시며 그에게 손을 대시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심지어 군중 틈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혈루병이 나은 여인도 예수님은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자락애 손을 대어 내 능력이 나갔다.”고 하시면 그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병낫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단번에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38년된 병자만 눈여겨 보시고 낫게 하셨습니다. 세리 삭개오의 집에 가셨습니다. 마태의 집에 가셔서 식사도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모여들었으나 주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주목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 없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온 골짜기를 헤맵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아 돌아오며 즐거움을 이기지 못해 벗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전도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저는 이런 마음을 우리 모두가 가지는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교회는 주님의 심장으로 굳게 서는 축복을 누리게될 것을 믿습니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또 작은 교회라고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기도해야할 이유 글쓴이 : 윤희문 2017.09.20

기도해야할 이유

낡은 신발과 낡은 옷을 입고, 심지어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해 먼 곳에서 온 것처럼

꾸민 기브온 주민들은 여호수아를 속여 그들의 생명을 보장 받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이 일을 대하며 범한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 입니다.

내 지혜로,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야 말로 가장 어리석어 지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크고 작은 일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고 나아감이 얼마나 든든한지요. 우리의 안정감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이 아닌 바로 주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쉽게 빠지게 되는 오류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일해서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 그대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시”(신명기 31:8).

 

우리는 기도하면서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하면서 내일을 위하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나의 생각과 계획을 맡겨드립니다.

 

시간이 남아서, 여유가 있어서, 말씀 앞에 서는 것이 아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일 가운데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합니다. 오직 살 길, 그 길입니다. “해야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를 시작하는 첫 세 시간을 기도해야만 한다”(마틴 루터).

 

크고 작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친히 우리 앞에 가시는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하는 제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남은 2017년도 기도하면서 하늘 보물 창고를 여시고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아 이웃에게 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대 사람들 글쓴이 : 윤희문 2017.09.13

이 세대 사람들

 

유진 피터슨이 쓴 이 책을 먹으라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예수를 영접하고 뜨겁게 신앙 생활하는 부부 이야기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재미가 너무 좋은 부부는 열심히 성경을 묵상하고 나누고 질문했다. 어느날 부인이 피터슨 목사에게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는 열심히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부인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남편이 던진 조언의 말은 이렇다. “메리, 그대로 살아야해. 그래야 이해할 수 있어. 밖에선 도무지 알 수 없고, 그 안에 들어가야 돼. 아니면 그게 당신 안으로 들어오든지.”

 

유진 피터슨 목사는 존 캘빈의 글이라고는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이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초년생인 남편 안토니의 말을 빌려서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밝혀주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자 하는 소망과 그것을 행하려는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거부하던 사람들을 이 세대 사람’(7:31) 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기쁜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 마음이 굳어져 있고, 자기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세대의 방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세례 요한을 비판했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물리쳤다.’(7:30) 고 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마음에 뜨겁게 느낀다고 하면서도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길 가요, 가시밭이요, 돌짝밭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지 않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이 평안히 쉴 수 있는 길로 가지 않는’ (6:16)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나를 슬프게한 일이 무엇인가요? 나를 기쁘게한 일은 무엇이었나요? 내 영혼의 현주소를 알아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마음 속에 넣어주시고 마음에 새겨주신 말씀이 성령의 터치로 나의 영을 새롭게 하고 내 눈을 뜨게 하고 내 몸을 움직여 그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열매맺게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을 알고 있나요? “나는 그들을 잘되게 함으로 기뻐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이 이 땅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살게 하겠다.”(32:41)


내 손을 내밀어 드립니다 글쓴이 : 윤희문 2017.09.07

손을 내밀어 드립니다

 

헨리 나우웬이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중에서 제비를 도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많은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실은 진짜 박수를 받아야할 사람은 곡예사의 손을 잡아 주는 곡예사가 진짜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공중을 도는 곡예사의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팔을 내밀고 믿는 것뿐입니다. ‘잡는사람이 나를 잡아 끌어올려줄 것이라 믿고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즐거움의 모든 가운데서 언제나 우리를 잡아 주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수술을 받아야할 때를 기다리면서도, 고통과 싸우면서 절망적일 때도 그리고 기쁜 일이 있거나 승승장구하는 순간 뿐만 아니라 앞길이 막막한 순간에도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하셔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손을 마음 놓고 내밀어 드릴 있습니다. 기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슬픔까지도 무거운 짐인줄 알면서도 움켜쥔 살아가는 우리의 손을 폅니다. 우리를 잡아 이끌어 올려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맡겨드리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곡예사처럼 공중을 날고 춤을 추는 법을 배워갑니다.

 

노순이 권사님께서 수술 받으시던 , 새벽에 시편을 읽으며 은혜받으신 말씀을 나눕니다. “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에게서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 찬양 받으십시오.”(시편 66:20)


은혜로 삽니다 글쓴이 : 윤희문 2017.08.31

은혜로 삽니다

 

벌써 9월 입니다. 엊그제 우리 자녀들이 축구장에서 cheer leader 하면서 춤을 추던 날이 어제 같습니다. 그런데 벌써 아기 엄마들이 되었고, 우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한 작가가 페이지도 매겨지지 않고 제본도  되지 않은 소설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앞뒤가 온통 뒤섞인 책을 읽으면서 제각각 책의 내용을 파악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에 이르러야 했는데,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이 일은 방향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어느 정신 분석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 세대는 자기 스스로와의 만남도 없이,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접촉도 없이다만 공허와 혼란, 혼돈과 무의미로 가득 찬 무기력한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을 파멸시킬 만한 충본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자기 어깨에 매고 사는 사람은 분명 파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다면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불안하지 않고 평안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항상 끌려 다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부모님에게, 학교에서,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직장에서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는 허무하고 공허하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덩그리니 양로원의 작은 침대 하나 놓여있는 방이 남아 있는 모든 것입니다. 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온 줄 알았는데 정작 나를 위해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을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배라고 믿을 때 우리 인생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주님을 믿고 경배하며 찬양하며 나아갈 대 자연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은혜와 긍휼의 법칙이 우리를 감싸주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나를 둘러싸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만나도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앞을 가로막는 홍해의 파도가 갈라지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시며 물이 없을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절망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운행하시도록 초청하는 가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잠언 19:21).


내가 한다 글쓴이 : 윤희문 2017.08.22

내가 한다

 

목장 예배에서 마가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깊에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마가복음의 주제 가지는 예수님의 이적과 수난입니다. 마가는 두가지로 예수님의 사역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8 까지는 예수님이 이적이 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후반부에 접어드는 9장부터는 이적은 줄고 수난이 늘어가는 것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가복음을 서론을 가진 수난의 기록이라고도 합니다. 수난을 말하기 위해 8장까지의 말씀이 서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분에 대해 깨닫지를 못했습닏.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뒤이어 수난받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마가는 특별히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이런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떠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적을 베푸시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능력을 주님을 있다면, 이제는 수난을 받으셔야할 예수님에 대해서도 우리의 눈이 떠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며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탄식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하셔야할 일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 못하는 불쌍한 무리들을 향한 탄식입니다.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는 백성들을 향한 탄식입니다. 오천명을 어떻게 먹여야할지 고민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한다 말씀하십니다.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병도 고치시지만, 우리 스스로 갚을 없는 죄의 댓가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심으로 대신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 중에는 믿음을 중요시하는 에수 믿음이 있고, 실천을 중요시하는 예수 따르미 있습니다. 필요하지만, 이것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예수 닮음이 되어야 합니다. 세가지가 우리 신앙 생활에서 연결 고리가 되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갑니다. ‘성경 읽기는 읽기이고, 만들기이며, ‘성경읽기는 세상읽기이고, 세상 만들기입니다.

 


열방에 전하는 구원 글쓴이 : 윤희문 2017.08.22

열방에 전하는 구원

 

오늘부터 제자 훈련 수강 신청을 받습니다. 우리는 제자 훈련을 받으며 성경 공부를 할까요? 제직이 되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알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만이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이유와 복의 통로는 있어도 궁극적인 제자 훈련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우리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어느 때보다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따른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요 주님요 친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살아계시고 다시 오신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은 그런 우리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래서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뭐가 다르지? 너희 하나님은 지금 어디 있지?’

 

오늘날의 교회는 전도가 힘들고 되지 않는다고 할까요? 교회 성장은 불신자들이 믿게 되어 세례를 받아 교회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왔든 이미 믿는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기 위해 돌아 다니는 백화점의 가게같은 형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삶과 행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분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자비와 얼굴의 환한 빛이 우리에게 머물 있도록 마땅히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총애를 입고 그분의 은혜를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그분의 복과 아름다움을 통해 그분께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 훈련과 성경 공부는 이런 열매를 거두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것이 단지 우리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듯 다른 이들에게도 복이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끝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열방의 구원을 목적으로 살아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제자 훈련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 그분의 구원을 세상에 알리기 원해서 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 훈련은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통해, 영원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모하여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방의 구원을 바라고 소원하지만 단지 열방의 유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영광이 드러나도록 우리는 훈련받고 주님을 닮아가며 열방의 구원을 위해 쓰임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 알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시편 67:1-3)


행복한 이유 글쓴이 : 윤희문 2017.08.10

행복한 이유

 

하나님의 사람들은 행복자 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지파를 위하여 축복하고 결론적으로 외친 말은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행복자로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신명기 33:20-29)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땅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그것을 찾고 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파랑새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잡으려면 자꾸만 멀어져갑니다. 행복은 사람이 힘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거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사람을 창조하시되 행복하게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사람은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면서 행복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건져주셔서 민족의 역사와 삶에 간섭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들을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했지만 그들을 가나안 앞에까지 지난 40년동안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자인 이유는 그들이 이제 땅을 차지하게 되어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그들로 행복자가 되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고생하지 않게 하셔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택하시고 부르셨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로마서 8 35)


고난이 기도와 만나면 글쓴이 : 윤희문 2017.08.02

고난이 기도와 만나면

그동안 새벽 기도 말씀으로 욥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고난과 인내는 핵심입니다. 야고보도 그의 편지에서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쓰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의 믿음은 고난에 의해 강하게 세워지기보다 산산조각나서 파선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셨고 가지 밭의 비유에서 이를 묘사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고난이 찾아오면 그들은 떨어져 나갑니다.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4:17)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항상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고난은 믿음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뭇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씀들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4:25). 고 합니다.

 

고난은 장래의 은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견딤으로써, 믿음이 자라서 강해지고 그것이 헛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라는(고린도전서 15:2) 부름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4:25).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은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주요 수단 하나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기도와 만나면 깨어짐이 일어납니다. 자아의 깨어짐입니다. 단단해진 마음의 깨어짐입니다. 그리하여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 낮아진 마음이 됩니다. 잘 갈구어진 마음이 됩니다. 깨어진 마음 속에 말씀이 떨어지면 깨달음이 생깁니다. 깨달음이 생기면 순종하게 되고 지속해서 순종하면 열매를 맺습니다.

 

만약 우리의 고난이 아무런 목적도 향방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다스리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변덕스럽고 잔인하다고 생각한다면(욥이 그런 것처럼),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도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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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은 어떻게 하나? 글쓴이 : 윤희문 2017.07.27

묵상은 어떻게 하나?

 

경건의 시간에 말씀 묵상을 하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엔 어느 방법으로 하든지 좋습니다. 특별히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내게 편한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어느 방법으로 하든지 우리가 마음에 꼭 담아 두고 해야할 묵상의 자세가 있습니다. 이 묵상의 태도는 어느 방법으로 하든지 항상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듣게 됩니다. 말할 때는 귓속말로도 듣고,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손을 통해서 듣고, 눈을 바라볼 때는 그 눈길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사랑해요!’ 그리고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고 늘 지금 곁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도 똑 같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매일 내 가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굳이 이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분석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런 줄 알고 믿어줍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 속으로 깊이 담아두며 달콤함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하고 큐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을까?” 라고 묻지 말고 다만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가?”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나?” 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말씀을 오랫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되새김질 해봅니다. 그 말씀이 성경책에서 읽은 활자가 아니라 나에게 분명해져서 내 가슴에 새겨질 때까지 그리고 나의 것이 될 때까지.


영성 지도 글쓴이 : 윤희문 2017.07.20

영성 지도

 

목자와 목녀가 일대 일로 목장 가족들을 양육하는 훈련을 오늘부터 받게 됩니다. 생명의 삶을 마친 교우들이 다음 제자 훈련으로 확신의 삶을 합니다. 7주 과정인 이 훈련을 남자인 경우엔 목자, 여자인 경우엔 목녀와 함께 일대 일로 훈련을 받으면 됩니다. 목자와 목녀가 일대 일로 양육하기 위해 다시 확신의 삶을 재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영성 지도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한 성경 공부가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만큼 친밀한 관계와 영적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영성가 중에 토마스 머튼(1915-1968)이 있습니다. 이 분은 칠층산이란 자선적인 책을 썼는데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성경보다 더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합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문학박사까지 한 석학인데 시를 쓰고 재즈에 열광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내면의 깊을 갈등을 겪다가 극적으로 회심하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가 죽기까지 수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45편의 작품을 썼는데 칠층산은 자선적인 대표작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는 자기 이야기가 칠층산입니다. 자기 내면의 체험을 기록한 글입니다. 머튼은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고 가장 자기다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거룩하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균형, 그 조용한 목회 혁명에 보면, 목회에서 중요한 세 가지를 말씀과 기도와 영성 지도라고 꼽습니다. 헨리 나우웬도 영적 발돋움에서 세가지를 똑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목장을 섬기며 목양하는 것도 목회입니다. 목자에게도 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목자에게도 말씀과 기도가 필수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장 가족들을 돌보며 영성지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멘토링과는 다른 차원의 관계입니다. 멘토링은 전수의 측면이 강조되지만, 영성 지도는 함께하는 동반자적 관계를 더욱 중요시 합니다. 서로 대화를 들어주고 삶을 나누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게되는 관계입니다. 목자와 목녀들이 일대일로 목원 가족들과 만나는 훈련의 시간이 바로 말씀과 기도, 영성지도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너는 말씀 묵상이나 제대로 해라 글쓴이 : 윤희문 2017.07.13

너는 말씀 묵상이나 제대로 해라


제가 목회하면서 항상 부러워하는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화음까지 맞추어 가면서 합니다. 저는 그래서 항상 노래 잘하기를 바라고  노래 잘하는 사람을 부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주변이 없습니다. 원래 말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말을 필요가 없을 때는 별로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불평이지요. 어디 차를 타고 가는데 시간이고, 시간이고 말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편하거든요. 그런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타고난 것이라 쉽게 되지 않고, 말주변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별히 말을 소금같이 고르게 있는 지혜도 구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가끔 목회는 잘하는지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합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같은 생각이 듭니다. 게으르지 않게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고 목회하려고 애써 왔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도 속에서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말씀 묵상을 하며 말씀이나 외워보았니?”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를 세우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목회를 하고 못하고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과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흙으로 지음받아 누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란 사실입니다. 결국 내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고후 4:7). 그래서 올해는 더욱 말씀에 깊이 들어가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말씀도 제대로 묵상하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노래를 잘하면 무엇하며, 설교를 잘하고, 말주변이 좋아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무슨 훌륭한 일을 했다는 것이 누가 하는 일이냐는 것이죠.


 오직 말씀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면서 주님을 따를 열매도 맺고, 신앙이 성숙해져갈 것입니다. “말씀 묵상이나 제대로 하라 주님의 음성은 핀잔이 아니라 인생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시는 충고였습니다. 최선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음성에 순종할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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